상설전시

관동 조선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 기획전

간토 코리안 제노사이드와
국가 그리고 민중

제 2부
지역에서의 학살

후나바시에서 일어난 일―지바현―

船橋で起きたこと-千葉県-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神奈川県相模原)만에서 매그니튜드 7.9의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바현(千葉県)에서 시즈오카현(静岡県)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건물의 붕괴나 화재 등으로 인한 사상자 및 행방불명자는 10만 5천명이라고도 일컬어집니다. 도쿄(東京)와 요코하마(横浜)에서는 오전부터 “조선인들이 불을 지른다” 등의 유언비어가 퍼졌습니다. 유언비어의 확대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은 경찰, 행정 등을 관할하고 있던 내무성이었습니다. 내무성은 2일 오후 해군의 무선송신소에 전령을 보내 조선인들이 “불령”스러운 짓을 하고 있다는 내용을 이튿날 전국으로 타전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사이타마현(埼玉県)을 통해 관할 행정구역에 조선인들을 경계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일본 정부가 유언비어를 선전하여 각 지역에 자경단이 조직되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밝혀졌습니다.

1923 年9 月1 日午前11 時58 分、神奈川県相模湾でマグニチュード7.9 の地震が起こりました。千葉県から静岡県にかけての広い範囲に甚大な被害をおよぼしました。建物の倒壊や火災等による死者・行方不明者は、10 万5 千人ともいわれています。 午後から東京や横浜では、「朝鮮人が放火する」などの流言が飛んでいます。流言の拡大に積極的な役割を果たしたのは、警察や行政などを管轄していた内務省でした。2 日午後に海軍の無線送信所に伝令を送り、翌朝全国に朝鮮人が「不逞」を働いていると打電させました。同日、埼玉県を通じて市町村に朝鮮人への警戒を呼びかける指示を出し、流言は政府により宣伝され、各地に自警団が組織されたことが明らかになっています。

「후나바시주변약도」:×표시가 학살 사건이 있었던 지점
(지바현 추도・조사실행위원회『いわれなく殺された人々』)
후나바시, 마고메 묘지(馬込霊園) 「간토대진재희생동포위령비(関東大震災犠牲同胞慰霊碑)」
1947년 재일조선인연맹 지바현 본부에서 건립[뒷면]
“야마모토 군벌내각은 계엄령을 시행해 사회주의자와 조선인들이 공모하여 폭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말로 재향군인과 우매한 민중들을 선동, 교사하여 사회주의자와 우리 동포를 학살시켰다”고 적혀 있다.
船橋、馬込霊園「関東大震災犠牲同胞慰霊碑」1947 年、在日朝鮮人聯盟千葉県本部建立 [ 裏面]「山本軍閥内閣は戒厳令を施行し社会 主義者と朝鮮人たちが共謀して暴動計画中だ という無根な言辞で在郷軍人と愚民を扇動教 唆し、社会主義者と我が同胞を虐殺させた」と ある。
관헌과 자경단에게 쫓기는 조선인 / 초등학생의 기념화집(『太陽』1977년 2월호) 실제 그림에는 오른쪽 상단에 나카야마(中山)라는 지명이 적혀 있다.
「官憲と自警団に追われる朝鮮人」 小学生の記念画集(『太陽』1977 年2 月号)原図には右上に「中山」との地名がある。
간도계엄령사령부의 비라:후나바시 시내의 한 집에 보존되어 있었다. 이 비라는 행정단위 말단인 구장에게까지 배포되었다. 그리고 후나바시에서는 두 번에 걸쳐 하늘에서 살포되었다(지바현 추도・조사실행위원회『いわれなく殺された人々』)
「関東戒厳司令部のビラ」:船橋市内の某家保存。このビラは行政単位末端の 区長まで配布された。また船橋市では二 度にわたって空からまかれた。(千葉県における追悼・調査実行委員会 『いわれなく殺された人びと』)

나라시노 수용소 및 인근 마을에서의 학살

収容所および近隣の村での虐殺

-경찰, 군대, 민중이 확산시킨 유언비어

警察・軍隊・民衆が拡げた流言

9월 7일 나라시노 수용소는 인근 마을에 “조선인들을 내어 줄 테니까 받으러 오라”고 알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15명 받아 와서 각 구별로 배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8일, 9일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군대는 마을 사람들에게 살해시키기 위해 조선인들을 받으러 오라고 한 것입니다. 다카쓰(高津)에서 6명(그 중 1명은 오사카(大阪)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오와다신덴(大和田新田)에서 3명, 가야타시모(萱田下)에서 3명, 가야타카미(萱田上)에서 1명, 오와다(大和田)에서 2명이 살해당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후나바시에서는 9월 6일 조선인 박해를 금한 계엄사령부의 비라가 배포되었지만 이들 희생자가 살해당한 것은 그 후였습니다.
현재 오와다신덴, 가야타 초후쿠지(萱田長福寺), 가야타 나카다이(萱田中台) 묘지, 다카쓰 칸논지(高津観音寺)의 네 곳에 공양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9月7日、習志野収容所から付近の村に「朝鮮人をくれてやるから取りに来い」との知らせがありました。村人は「15人もらってきて各区に配当し」と記録しています。8日、9日にもまた下げ渡されました。軍隊は村人に 殺害させるために取りに来させたのです。高津6人(うち1人は大阪の人ともいわれる)、大和田新田3人、萱田 下3人、萱田上1人、大和田2人が殺されたことが確認されています。船橋では9月6日に朝鮮人に対する迫害 を禁じた戒厳司令部のビラがまかれていますが、これらの犠牲者が殺されたのはそのあとのことでした。
現在、大和田新田、萱田長福寺、萱田中台墓地、高津観音寺の4ヶ所に供養碑が建っています。

기미즈카 쿠니하루(君塚國治)
부락 사람들이 처분해야 한다.

사람도 너무 많고 소란을 피워 곤란하다고 하는 것을, 그러니까 야치요에서 각 자경단이 받아 온 거지. 받아 와서 이 밑의 하카데라(墓寺)에서 하룻밤 재워서 다음날 다 같이 의논을 했어.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부락마다 받아 온 부락 사람이 처분해야 했었지.
조선 놈들은 어떻게든 총으로 쏴 달라고 했었어…이 위의 묘지에 구멍을 파서 당사자들이 말한 대로 총으로 쏴 주기로 했어. 쏠 때까지 힘들어. 말로 하면 간단하게 들리겠지만 같은 사람인데 그들한테 심한 짓을 하는 거니까. 마지막으로 쏘는 사람도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다는 게지. 좀처럼 쏘지를 않는 거야. 네가 해라, 그쪽이 해라…결국 사용 허가를 받은 총을 가진 사람이 하게 되긴 했지만…
(지바현 추도・조사실행위원회『いわれなく殺された人々』)

君塚國治
-部落の者が処分しなければいかん-

多くて乱暴をして困るというのを、つまり八千代で各警防団でもらってきたわけなんだよね。もらってきて、この下の墓寺へ一晩とめて、次の日にみんなで協議した。こういう方法にしようとか、ああいう方法にしようとか。部落部落にもらってきた部落の者が処分しなければいかん
…朝鮮の奴は、なんとしても鉄砲でうってくれという…この上の墓地に穴ほって、当人の言うとおりに、鉄砲でうってやれ。うつまでがたいへんだ。話をすれば簡単に言うけれど、同じ人間をひどい目にするんだからね…最後に、撃つ者も、あまり気持ちよくないなというわけです。なかなかやってくんないだよね。おめえやれとか、そっちやれとか、…とうとう鑑札をうけた鉄砲をもっている人にやってもらったけどね…
(千葉県における追悼・調査実行委員会『いわれなく殺された人びと』)

야기가야 타에코(八木ヶ谷妙子)
그날 아침 종이 울렸다.

지진이 일어나고 며칠 지난 후였다고 기억합니다. 그날 아침 종이 울렸습니다. 당시 그 종은 나무 사다리 위에 달려 있었는데 그 옆에 얼룩진 메리야스 반팔을 입고 볕에 그을린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이 사다리에 묶여 서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부터 묶인 사람을 선두로 공동묘지까지10분 정도 흙길을 걸어갔습니다. 도착한 공동묘지에는 이미 구멍이 파져 있었는데 그곳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끌려 간 사람은 눈가림을 당해 그 소나무에 묶였습니다. 들어보니 사람들이 조선인을 어떻게 죽이는 것이 좋을지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본인이 그것을 원했다고 했습니다…그 사람은 총을 맞고 구멍에 매장되었습니다만 저는 너무 무서워서 그곳을 빠져 나와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간토대진재70주년기념행사실행위원회『この歴史を永遠に忘れず』)

八木ヶ谷妙子
-その朝、半鐘がなった-

地震の後、数日過ぎたと記憶しております。その朝、半鐘がなった。その当時、半鐘は木のはしごで、その脇に薄汚れたメリヤスの半袖を着て、日焼けした、30歳かそれ以上か、人が繋がれて立っておりました。 そこから繋がれた人を先頭に埃道を共同墓地まで10 分くらい歩きました。辿り着いた共同墓地には、すでに穴が掘ってあって、そこに一本の松の木がありました。引かれていった人は目隠しをされ、松の木に縛りつけられました。話に聞くと、どういう殺し方がいいか、本人がそれを希望したということです。・・その人は銃で撃たれ、穴に埋められるのですが、私はもう、こわくてそこを去って逃げるように家に走り帰ったのです。
(関東大震災70 周年記念行事実行委員会 『この歴史永遠に忘れず』)


조인승 씨(曺仁承),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曺仁承(チョインスン)-九死に一生を得て

―다리는 시체로 가득했다.―

-橋は死体でいっぱいだった –

조인승 씨(경상남도 거창출신 1902-1984)는 1923년 1월에 일본으로 건너 왔다. 8월에 도쿄로 가서 9월 1일 간토대진재를 겪게 되었다. 1일 밤 가쓰시카(葛飾)와 스미다(墨田)의 경계에 있는 구 요쓰기(四ツ木)다리 위에서 자경단에게 붙잡혀 다음날 아침 데라시마(寺島)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구 요쓰기다리 위와 데라시마 경찰서에서의 동포학살을 목격했지만 조인승 씨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曺仁承さん(慶尚南道居昌出身1902‐1984)は、1923 年正月に日本へ渡った。8月に東京へ来て、9 月1 日の関東大震災に遭遇した。1 日夜、葛飾と墨田の境にある旧四ツ木橋上で自警団に捕まり、翌朝寺島警察署へ連行された。旧四ツ木橋上や寺島警察署での同胞虐殺を目撃しながら、曺さんはかろうじて生き延びた。

(9월 1일은 지진으로) 집이 위험하다고 해서 아라카와(荒川) 둑으로 가니까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불이 타 들어 오기에 요쓰기 다리를 건너서 1일 저녁에는 동포 14명과 함께 있었다. 그곳에 소방단원 4명이 와서 밧줄로 우리들을 염주알 꿰듯이 묶어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이 자리를 뜨지만 밧줄을 끊으면 죽여버리겠다”. 가만히 있으니 밤 8시경 건너편의 아라카와 역(현재 야히로역(八広)) 쪽 둑이 소란스러워졌다. 설마 조선인을 죽이고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음날 5시경, 소방단원 4명이 다시 와서 데라시마 경찰서로 가기 위해 요쓰기 다리를 건넜다. 그곳에서 3명이 끌려 와서 일반인들에게 뭇매를 맞고 살해당하는 것을 우리들은 옆 눈으로 보면서 다리를 건넜어. 그때 내 발에도 쇠갈고리가 와서 박혔어. 다리는 시체로 가득했지. 둑에도 장작더미가 쌓여 있듯이 여기저기에 시체가 쌓여 있었어. (간토대진재 때 학살당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해 추도하는 모임 『風よ鳳仙花の歌をはこべ』)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지간해서는 불가능하잖아. 그렇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단지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사는 것이 고작인 조선인들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전쟁도 아닌데
(裵昭『写真報告 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

(9月1日は地震で)家は危ないからと荒川土手に行くと、もう人はいっぱいいた。火が燃えてくるから四ツ木橋を渡って1日の晩は同胞14 名でかたまっておった。そこへ消防団が4人きて、縄で俺たちをじゅずつなぎに結わえて言うのよ。『俺たちは行くけど縄を切ったら殺す』って。じっとしていたら夜8時ごろ、向かいの荒川駅(現八広駅)のほうの土手が騒がしい。まさかそれが朝鮮人を殺しているのだとは思いもしなかった。翌日の5時ごろ、また消防が4人来て、寺島警察に行くために四ツ木橋を渡った。そこへ3人連れてこられて、その3人が普通の人に袋だたきにされて殺されているのを、私らは横目にして橋を渡ったのよ。そのとき、俺の足にもトビが打ちこまれたのよ。橋は死体でいっぱいだった。土手にも、薪の山があるようにあちこち死体が積んであった。(関東大震災時に虐殺された朝鮮人の遺骨を発掘し追悼する会『風よ鳳仙花の歌をはこべ』)
人間が人間を殺すのはよっぽどの事じゃなくそれできないだよ、ね? ただ何もしないのに働いて食うのに精一杯の朝鮮人にそんなことして、いくさでもないのに?(裵昭『写真報告 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지간해서는 불가능하잖아. 그렇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단지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사는 것이 고작인 조선인들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전쟁도 아닌데
(裵昭『写真報告 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

구 요쓰기 다리
旧四ツ木
구 요쓰기 다리 위 함석을 덮어씌워놓은 시체들(재일한인역사자료관 소장)旧四ツ木
旧四ツ木橋上のトタンをかぶせられた死体(在日韓人歴史資料館所蔵)

신홍식(申鴻湜)―나라시노 수용소에서

申鴻湜(シンホンシク)―習志野収容所で

―나는 수용소에서 끌려 나왔다―

-私は収容所から連れ出された-

신홍식 씨(전라남도 광주 출신 1905-1994)는 19살 학생 때 도쿄 구단시타(九段下)에서 간토대진재를 겪었다. 료코쿠(両国)의 육군피복공장터로 몸을 피했지만 위험을 느끼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도중에 여학생을 도와 이치카와(市川)로 데려다 준 후 지바의 도가네까지 도망갔지만 자경단에게 습격 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도가네 경찰서로 보호를 요청하여 그곳에서 나라시노 수용소로 보내졌다.
수용소에서는 도망치려 했던 중국인이 군인에게 사살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수용소 내의 자치조직에 관여했던 신홍식 씨 본인도 하마터면 살해당할 뻔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2003년 8월에 발견된 헌병대의 자료에 의해 수용소 내에 조선말을 할 수 있는 헌병이 배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申鴻湜さん(全羅南道光州出身1905-1994)は、19 歳の学生のときに東京九段坂で関東大震災にあった。両国の被服廠跡へ避難したが、危険を感じてそこを抜け出した。途中で助けた女学生を市川まで送り届け、千葉の東金まで逃れたが、自警団の襲撃のおそれがあるので東金警察署へ保護を求め、そこから習志野収容所に送られた。 収容所では逃げ出そうとした中国人が軍人に撃ち殺されるのを目撃した。収容所内の 自治組織にかかわった申さん自身もあやうく殺されるところだった。なお、2003 年8月に発見された憲兵隊の資料によって、収容所内に朝鮮語のわかる憲兵を送り込んでいたことが裏付けられた。

사진:배소 제공
写真:裵昭提供

우리들은 지바육군보병 교도연대의 병영으로 끌려 갔습니다. 교도연대는 특수 연대였어요…수용소에서 꽤 걸어갔는데 2, 30분 정도였어요. 군인이 혼자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 뒤를 우리는 따라 갔습니다. 내가 가기 전에 한 사람이 곤욕을 치렀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나도 그리 돼지 않을까 생각하며 따라 걸었습니다. 그러자 개 한 마리가 앞쪽에서 나타났어요. 앞서 가던 군인이 군도를 뽑아 들어 그 개를 두 동강 내더니 “사람한테 이렇게 하면 기분이 좋겠지?”라고 하더군요.
아마 교도연대가 수용소를 관리했었나 봅니다. 그 곳의 특무조장이 “당번을 정해서 식사하다니 자치조직을 만들던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어 봤어요.
“너 정말 운 좋다. 지금 큰일이야. 조선인 소동 때문에 큰일 났어” 정말 이렇게 믿고 있는 듯 했어요. 조선사람들이 우물에 독을 넣고 날치기하고…
특무조장은 내게 “넌 운이 좋은 놈이야”라고 말했어요. 확성기로 이름이 불려 간 채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私などは、千葉陸軍歩兵教導連隊の兵営につれていかれました。教導連隊は特殊な連隊なんですね。・・・収容所からかなり歩いたところで、20~30分のところでした。兵隊が一人前に立ってとっとっと歩いて行く後を私はついて行きました。私の前にも一人ひどい目にあったと聞いていたので、私もひどい目にあうのかなと思ってついていきました。すると犬が一匹、前から来たんです。すると兵隊はいきなり軍刀をぬいて犬を真二つに切って、「人間をこういう風にしたら気持がいいだろうな」というのです。
おそらく教導連隊が収容所を管理していたのかな、そこの特務曹長が「当番をきめて、食事なんかやって、そういう自治をつくっているのは誰か」ときくわけです。
「お前は、しかし運がいいなあ、いや、今大変だよ。朝鮮人騒ぎで大変だよ」本当にそう思っているようでしたね。朝鮮人が井戸に毒を入れたとか、かっぱらいをしたとか。・・・
私のことを特務曹長は、「お前は運のいいやつだ」といっていましたよ。拡声器かなにかでよばれて、いったら帰ってこないのがいましたからね。
『いわれなく殺された人びと』より

나라시노 수용소의 야마나시(山梨) 계엄사령관과 조선인
「習志野収容所における山梨戒厳司令官と朝鮮人」 (『現代史資料6関東大震災と朝鮮人』)
조선사람들을 수용소로 호송하는 군대, 군대는 무장을 하고 조선인을 호송했다.
「収容所へ朝鮮人を護送する軍隊」 軍隊は武装して朝鮮人護送に当たつた。 (『朝日クロニクル・20世紀2「恐怖・革命・関東大震災」)=

죽을 각오를 했던 할머니, 할아버지들

死ぬ覚悟をした祖父母たち

살아남은자 정종석(鄭宗碩 ・도쿄 거주) ―숨겨 주어 살아 남았다.―

鄭宗碩(チョンジョンソク・東京在住)-かくまわれて生きのびる-

제 조부는 1920년 경에 일본으로 건너가 유바리 탄광에서 일했습니다. 그 후 진재 전에는 도쿄 스미다구 에 있었던 아즈마 제강소에서 일하면서 어렵사리 가족을 조선에서 불러왔습니다. 때때로 관헌이 집을 찾아와서는 감시를 하곤 했습니다.
유언비어가 퍼져 조선사람들이 자경단에 의해 차례로 죽어가던 때, 평소 우리 조부모 가족들을 챙겨 주던 공장장 사나다 치아키 씨가 우리 가족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더 이상 숨겨줄 수 없게 되자 수십 명의 일본인 노동자들에게 호위하게 하여 데라시마 경찰서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사나다 씨는 유언비어에 혹해 사람들을 죽이는 상황에 분개하여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있는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祖父は1920年頃に渡日し、夕張炭坑で働いた。その後震災の前には墨田区内にあった吾嬬製鋼で働きながら何とか家族を呼び寄せた。たびたび官憲が来ては、監視していた。
デマが飛びかい朝鮮人が次々と自警団に殺されて行く中で、日頃何かと面倒を見てくれていた工場長の真田千秋氏は祖父一家を自宅にかくまってくれた。かくまいきれなくなると、数十人の日本人労働者を護衛につけ、寺島警察署に送り届けてくれた。真田氏は、デマに惑わされ人を殺す様子に憤り、自身の身の危険も顧みず勇気ある行動をとってくれた。

아버지 정두만
父・鄭斗満(チョン・ドマン)
아버지의 막내 여동생 정우순(부산 거주)
父の末妹・鄭又順(チョン・ウスン)釜山在住
시나다 치아키 씨
真田千秋氏
스미다구 호센지에서 감사의 비 증정식을 보도한 아사히 신문 기사로 작성. 시나다 치아키 씨의 손자 시나다 후지히코씨 (왼쪽)와 정두만 씨의 아들 정종석 (오른쪽에서 두번째)
墨田区・法泉寺での『感謝の碑』贈呈式を報じた朝日新聞記事より真田千秋氏の孫・真田富士彦氏(左)と鄭斗満の子・鄭宗碩(右から2 番目)